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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TRAVEL/자전에세이

프롤로그(작성 중 - 미정리 상태)

by imfree21 2016. 1. 2.

<부친에 대한 기억>

 

나의 부친은 정치활동을 하셨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계몽주의 사회사업가였다.

부친이 서울의 양정고등학교를 거쳐 동경의 稻早田大學校(와세다대학교) 농과에 유학 중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았다. q조부께서는 아들이 징용당하는 것이 염려돼 긴급하게 부친에게 귀국명령을 내린다. 이에 고민하던 부친이 귀국을 망설이자 백부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신다. 결국 부친은 귀국을 받아들이게 된다. (당시 인테리계급이었던 동경유학생들의 선택은 크게 4가지로 나뉜다. 첫째, 만주독립군 합류파, 즉 무장투쟁파다(여기서 민족계열과 공산계열로 나뉜다). 둘째는 국민 속으로 들어가 눈을 뜨게 하여 힘을 기르자는 계몽주의파, 셋째는 서방-주로 미국-으로 건너가 넓은 세상을 배워오자는 서양유학파, 마지막으로 일본제국주의 통치 하에 들어가서 힘을 기르자는 용일파(用日派. 이 파는 일본이 대세이므로 일본이 지향하는 바에 따르자는 대동아공영권파-친일파親日派-와 구분이 어렵다)- 각 파의 명칭은 임의로 붙임.

이 중 '결과적'으로 계몽주의파인 부친이 귀국한 뒤의 활약한 활동을 요약하면 이렇다.

 

1. 야학의 설치운영-문맹타파 / 2. 시장(장마당)의 개설-자립경제실현 / 3.학교설립-인재양성 / 4.우체국설립-통신망확보  /5. 도로건설-물자와 인재의 유통 활성화 / 6. 지방의회진출-정치활동을 통한 꿈의 실현 추구.

 

물론 이 활동을 뒷받침한 환경적인 조건이라면 해방 이전의 신념과 조부가 이룩해놓으신 지역유지로서의 입지 환경이고, 해방 이후에는 '면장'이라는 지방행정기관장으로서의 지위와 조부로부터 받은 농토라는 물리적 토대다. 물론 그 것을 아울러서 행동으로 추동한 것은 부친의 철학과 신념일 것이다. 학교부지는 물론 시장마당을 닦는데 필요한 공간은 모두가 물려받은 토지 위에 세웠으며, 심지어 도로 건설에 필요한 재원도 땅을 팔아서 충당했다. 학교인가와 관련해서는 도청 학무국장으로 근무하시던 고모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학교를 세울 때 자기소유의 토지에 세웠지만(1948) 교사 건축에 필요한 재목을 국유림에서 베어다가 지었는데 이 때문에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설립 후 운영해야할 재정 부담이 너무 커 부친은 학교를 국가에 헌납하게 된다(1951). 즉 공립학교가 된 것이다. 사립학교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사임금 등 모든 운영비를 설립자가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경비는 결국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받아서 치뤄야하는데 당시 민중들이 살림살이가 자식들을 학교에 보낼만하지 않았고 농가에서는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학비를 내고 학교를 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운영비를 국가에서 부담하고 운영하는 공립학교로 전환, 헌납한 것이다.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은 것도 아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학교를 세우기도 운영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재정력이 부족할 때다. 아마 부친은 큰 고민하지 않고 결정했으리라고 짐작한다. 친척들과 면민들 그리고 모친과 부친의 지인들로부터 전해 듣은 바에 의하면 아버지는 땅의 소유에 대해 사적 소유 욕망이 투철하지 않은 분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노력해서 만든 땅이 아니고 조상으로부터 대가없이 받게 되어서 그랬을까 라고도 생각해봤지만, 더 가까운 건 유학생활 할 때, 당시 국내외에서 조국을 염려하는 동료들과의 소통에서, 시대가 부여한 환경적 요인에서 다져진 신념의 실천과정이 아니었을까 추론해본다)

 

".................. 59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떠나려하니 가슴아프다. 지나간 날을 허무하게 보내고 후회한 나머지 이제 남은 여생이나마 참된 생활, 행복한 생활, 평화로운 가정, 조직적인 경제생활, 부채없는 살림살이로..... 좀 더 인생다운 생활로 자식들의 교육과 정다운 왕래... 자식들의 결속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며 이상적인 가정을 이룩하여 보겠다는 나의 구상도 헛된 몽중몽으로 사라지는가 싶다.

 

나의 과거는 '돈' 모르는 생활을 하여왔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산으로 '돈' 귀한 줄 모르고 써왔다. 그러나 무가치한 낭비는 아니었다. 반은 ............"

 

 

위의 인용글은 부친의 유서책(위 사진)에 담긴 글의 서문 일부다.

그는 동시대의 많은 동경유학생들이 그러했듯이 삶의 대부분을 나라의 설움을 극복하려고 하는데에 힘을 쏟았다. 그 일들이 그의 삶을 지탱하는 활력소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분단이 되고 정부수립과정의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다 효과적인 지역사회사업을 위해 지역민의 추대에 의해 정치활동에 진출하게 되었으나, 무소속으로 당선되었던 부친은 자유당독재하에서 무소속 정치인이 겪을 수 밖에 없는 무력감에 빠진다. (김구선생이 주도하였던 한독당의 이름으로 잠시 활동하였던 기록이 있다-확인요망)

 

유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젊은 시절 나라의 힘을 길러보자고 국내로 들어와 계몽 활동을 펼치던 부친은 해방과 분단과 친일세력의 국가 장악, 그리고 정치군인들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거치면서 분노와 기대와 절망의 과정을 겪으셨으리라. 그 때 문득 가까운 곳을 둘러보니 가정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모친이 가정을 도닥거리고 있어 부친은 가족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무심하셨던 것 같다. 부친 덕분에 우리형제들은 지역민이나 관, 학교, 경찰 등으로부터도 주목과 관심을 받고 자랐으니 자아 존중감은 하늘을 치달았으나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았다. (토지가 적지 않았으나 부친의 사회사업과정에서 토지를 담보로 쓴 탓에 변제해나가야 하는 비중이 커졌고,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땅은 있어도 현금의 수급이 원할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당시 주민들의 보편적 생활상을 고려한다면 상대적으로 유복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부친이 위암으로 사망하신게 막내아들인 내가 막 11살이 되던 때 였고 막내여동생이 8살이었으니 눈이 감기지 않았을 듯 싶다. (당시 큰 형님이 대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고 손위 누이들은 졸업 후 출가하긴 했으나 아직 4남매가 올망졸망 눈에 밟혔을 것이다)

부친은 정치생활을 정리하고 가정경제를 견고히 하기 위해 서울에 신발 제조회사 인수 계약을 하였고, 계약금 지불을 위하여 열차타고 상경하던 중 절도를 당하였다고 한다. (속칭 ‘쓰리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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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학의 설치 운영

1. 안천중학교설립

1. 시장(장마당)설치

1. 우체국 설립

1. 도로건설

1. 정천중학교 설립 지원

1. 지역 인재들의 유학 지원

1. 6.25 한국전쟁시

1. 정치활동

1. 가족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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